십자군 제 2세대에 등장한 성직자 베르나르두스, 그는 '성직자가 세상의 잡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세계는 성서의 뜻대로 흘러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얼핏보면 현시대 진보적 성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버릴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당시 그가 말한 '세상에 대한 관여'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염두한 것이었다.

당시 존재했던 템플기사단과 성요한기사단의 생리와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템플기사단을 상찬하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교도는 모든 악이 담긴 항아리다. 악마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악의 표본이다. 이자들에 대한 대책은 하나밖에 없다. 근절이 바로 그것이다. 죽여라! 죽여라! 그리고 혹시 필요할 때는 그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그것이 신의 길이라고 믿었지만 역사는 그들의 살생을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사회참여"라는 말이 가진 긍정적, 혹은 소위 "개념있는 움직임"이라는 이미지는 어떤면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기도 한다. 참여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지양하거나,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 방식에 대한 고찰의 과정의 등한시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물론 베르나르두스처럼 군사적인 폭력을 동반한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기독교인은 더 이상 없지만(바다건너 큰 나라엔 수년전까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시대의 차이를 고려하면 현재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방식 안에 베르나르두스와 같은 오류가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뜬금없이 든 생각이지만 크로산이 말하는대로 예수의 도전하는비유를 사회에 던지는 비폭력적 저항으로서의 참여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의 도전하는 비유로부터 현 한국기독교의 바람직한 사회참여 모형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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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두번째사람